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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기 위해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관리자 2024.11.29 18:08:15 조회수 123

    후배가 선배에게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기 위해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임태일 목사
    (서울 · 마포 · 서강교회 담임)


    구자경 목사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에 사랑과 존경을 담아 문안 인사 올립니다. 유난히 추웠던 지난 1월에 시작한 편지가 벌써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기독교세계>에서 받은 청탁을 구실삼았지만, 목사님과 주고받은 필담은 평생에 잊히지 않을 소중한 경험이자 배움이요, 분주한 일상에서 맛본 행복이며 은총이었습니다. 일선에서 고군분투하는 목회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누군가에게는 위로였고, 누군가에게는 반성과 성찰의 계기였습니다. 소소한 쉼을 방해하면서 소매 끝을 잡아당긴 후배에게 사랑으로 답해주신 모든 일로 인해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구자경 목사님, 지난 편지도 잘 받아 읽었습니다. 교회 안에 일어나는 ‘갈등’에 관한 물음이었습니다. 편집부에서 pdf 파일을 보내주었을 때, 저는 그것을 종이로 인쇄해서 밑줄 그으며 읽었고 잠시나마 손을 모아 기도했습니다. 그동안 겪었던 목회 갈등을 변명의 구실로 삼은 적이 많아서, 주신 말씀에 사레가 들려 캑캑거려야 했습니다. 소개하신 <앙: 단팥 인생 이야기>라는 일본 영화도 찾아서 감상했는데, 벅찬 눈물을 참느라 혼났습니다. 50년 동안 단팥을 만들었다는 76세 요시에 도쿠이 할머니가 “젊은이, 단팥은 마음으로 만드는 거야.”라고 던진 그 말의 무게에서 목사님을 보았고, 처음엔 무심했지만, 짐짓 몸을 돌려 할머니가 주고 간 단팥을 입에 넣던 젊은 사장의 모습에서 저의 현실과 다짐을 내다보았습니다. 이 장면을 빠르게도 느리게도 몇 번이나 감아보면서, 몸을 돌리는 주인공의 움직임을 영적 가르침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영화를 소개할 때 목사님은 마치 베네딕트 수도회 규칙서를 소개하듯 “인내로, 철저히, 조심스럽게 하라.”고 간명하게 말씀하셨고, 편지를 마칠 때는 “부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라고 권면하셨습니다. 두 가지 권면을 숙고하다가 얼마 전 읽은 본회퍼 목사님의 설교가 생각났는데, 1932년 종교개혁주일을 맞아 본회퍼 목사님은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많은 일을 대단히 헌신적으로 진지하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나없이 둘째 일, 셋째 일, 넷째 일은 많이 하면서도 처음에 하던 일은 하지 않습니다. … 처음에 하던 일을 침착하게 행합시다!(『디트리히 본회퍼의 설교』)” 본회퍼의 설교와 목사님의 권면이 묘하게 닮았습니다. 두 가르침을 퍼즐 끼우듯 맞춰보니 목사들에게 ‘부디 하나님을 믿으라.’ 하신 뜻이 선명해지면서, 갈등이 발생할 때 읊조릴 ‘목회 규칙서’를 하나 얻은 듯 든든하기만 했습니다.

    구자경 목사님, 이번 달에 여쭙습니다.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기 위해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렇게 여쭙는 것은 “그리스도의 계절”이라는 찬양 가사에서 따온 것인데, 노래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소서.” 그리스도의 계절이란 말이 포근하고 아름답습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는 말에서 깊은 신학적 통찰이 느껴집니다. 어느 신학자가 말한 ‘적색 은총’과 ‘녹색 은총’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칫 형이상학적인 말로 들리기도 해서, 과연 붉은색과 푸른색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지 과제로 남습니다.

    거기에는 작사자의 의도가 있을 것이지만, 그것은 별개로 하고, 오늘날처럼 혼탁한 영적 계절에 그리스도의 계절을 소망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헷갈리기도 합니다.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육사의 ‘광야’)”의 계절을 벅차게 노래하다가 “새벽 밀물에 밀려온 거미(이육사의 ‘노정기’)”처럼 목놓아 울던 시인의 절망이 우리 시대가 아니고자, 교회가 나아갈 방향성과 지혜를 구하게 됩니다. 일전에 제가 “선교의 암흑기”라는 표현을 썼다가 목사님께 혼났던 기억이 납니다. “오히려, 교회의 시대가 왔다!”고 하셨지요? 그 일 뒤로, 여전히 부족하긴 하지만 생각을 고쳐먹고 어두워도 어둡지 않은 것을 찾고자 합니다. 그 어둠을 꿰뚫어 볼 영적 혜안을 얻고자 간구합니다. 목사님은 우리가 사는 시대를 어떻게 정의하시나요? 그리고 그 전망은 어떤가요?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기 위해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목사님 주신 권면처럼 부디 하나님을 더 믿게 되기를 구합니다. 지난 일 년, 감사했습니다. 복된 새해 맞으세요.

    와우산 아래에서
    임태일 목사 올림

    선배가 후배에게
    가슴마다 진정한 그리스도를 모셔야 그분의 계절이 올 텐데요

    구자경

    사랑하는 임 목사님! 보내주신 편지를 읽으며 빠른 시간의 흐름을 다시 확인하게 되는군요. 지난 1년을 목사님은 쉴 새 없는 목회 사역을 감당하느라 분주하셨고, 저는 빠르게 은퇴 후의 삶에 적응해 간 셈입니다. 그 사이 우리가 주고받은 편지를 목사님은 행복이고 은총이라 하셨지만, 저에게는 자칫 나태할 수 있는 은퇴 후의 삶을 깨워주는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반가운 손님이었습니다. 주님의 교회를 위한 간절함이 가득 담긴 목사님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게으름의 자리에서 퍼뜩 깨어나 지금도 제가 감당해야 할 기도의 사명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좋은 기회를 허락해주신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런 은총의 시간이 이제는 끝날 때가 되었군요. 마침 대림절이 시작되었네요. 연말에 찾아오는 대림절은 교회력으로는 새해의 시작이지요! 그러니 끝난 것은 편지의 오고감일 뿐, 우리에게는 그보다 깊은 교제가 새롭게 시작되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때가 때인 탓이겠지요? 목사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계절’을 물으셨군요. 목사님께 영감을 준 그 찬양을 찾아 들어보니 저에게는 아주 익숙한 구호였습니다. 제가 신학교 입학하던 해에 한 선교단체에서 전도훈련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 단체에서 내세웠던 구호거든요. 목사님이 소개하신 그 찬양도 아마 그 선교단체에서 만든 찬양일 것입니다. 그 단체를 설립하신 목사님은 지금은 세상을 떠나셨지만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젊은 청년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 당시 그분의 설교를 통해 수많은 청년이 회심을 경험하고, 헌신을 결단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일찌감치 그 선교단체를 떠났습니다. 목사님은 가사가 ‘형이상학적인 말로 들’렸다 하셨는데요. 저에게는 바로 그것이 한계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전설처럼 전해오는 얘기가 설립자 목사님의 ‘백문일답’입니다. 이 시대의 현안 100가지를 물으면 그에 대한 모든 대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물론 맞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대답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어떤 분이신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 선교단체에서 전도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 잘 알려진 소위 ‘4영리 전도법’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고백하고 자기 삶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라는 도전을 한 뒤, ‘영접 기도’를 따라 하면 ‘가슴에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은 천국 백성, 성도가 된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런데 당시 곳곳에서 젊은이들이 유신 군사독재에 항거하다 잡혀가 고문당하고, 옥상에서 떨어져 죽어가던 그 시대에 해답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어떤 분이셔야 했을까요? 과연 ‘엑스폴로 74’와 ‘80 세계복음화 성회’ 등 대규모 전도집회를 열어 300만이었던 성도를 1,000만 성도가 되게 한 것이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은 것이고, 시대의 문제가 그것으로 해답을 얻은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물론 그런 결실을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양적 성장 중심의 전도운동이 이 시대의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뿌리 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최근 발간된 책 한 권에 대한 서평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과 제자도(노종문 저)』라는 책인데, 이 책에서 저자는 ‘1세기 예수와 사도, 동시대인이 품었던 핵심 질문’은 ‘내가 어떻게 하면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있느냐’ 하는 개인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구원하는가’에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저는 그것을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이 그토록 외쳤던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회복하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믿음의 백성들이 세상 속에서 그 삶을 구체적으로 뒤따라 살아가는 것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는다는 것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 십자가에서 이루신 하나님 나라의 공의와 정의를 실현하며 살아가는 일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진정 가슴 벅찬 꿈입니다. 어린 시절 찰스 셸던의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책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성도들이 어떤 사건을 계기로 이 질문 앞에 응답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자 그 지역에 나타났던 놀라운 변화를 그린 책이지요. 목사님께서 던지신 ‘그리스도의 계절이 온다’는 말은 바로 이런 변화를 의미하는 것 아닐까요? 그리고 지속적으로 그 일을 일으켜야 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 아닐까요?

    UN이 발표한 ‘세계 행복 보고서 2023’에 따르면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OECD 38개국 중 35위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부동의 자살률 1위라는 수치입니다. 원인이 무엇일까요? 많은 이들이 ‘압축성장’ 탓으로 진단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성장은 이루었는데 내면은 오히려 성숙이 아닌 미숙함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내면적 성숙’을 이루는 일에 관심을 촉구해야 하는 것이 교회 아닙니까? 그런데 교회 역시 성장하는 일에만 몰두하는 바람에 마땅히 감당해야 할 역할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가 이 모습에 실망한 세상이 교회를 향해 퍼붓는 모멸 가득한 비난입니다.

    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성장을 말하고 가르치는 것은 너무나 쉽습니다. 그러나 내면적 성숙, 공의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존재의 진정한 변화는 정말 낯설고 어렵습니다. 그래서 아주 작은 변화만으로도 세상 속에서는 큰 감동의 파문을 일으키는 역설이 일어납니다. 때로 이웃을 위해 진실한 마음으로 나눔과 희생을 실천하는 일이 드러날 때 사람들이 얼마나 큰 감동을 받는지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은 그런 일에 그만큼 목이 마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처음 이 서신을 나누었던 지난 1월의 논의 주제로 돌아가 보고 싶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목회란 무엇’이냐고 물으시면서 ‘선교의 암흑기’라는 말을 하셨지요? 저는 그에 대해 서슴없이 ‘암흑기가 아닌 황금기가 도래한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외면하고 딴 길을 고집하는 교회라는 조직을 어떻게든 살려내고 성장시키려고 발버둥 치는 것을 굳이 선교라고 정의한다면 암흑기가 도래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이제까지 자신이 걸어온 길을 하나님 앞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마땅히 자신이 지켜야 할 모습을 회복하고 가야 할 길을 가려고 힘써 몸부림치려 한다면 선교의 황금기가 활짝 열릴 것입니다.

    베드로의 첫 번째 편지를 보면 초대교회 당시, 세상은 교회와 성도에게 악과 욕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선행을 욕하며 비방하는 일들도 허다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을 향해 ‘도리어 복을 빌’면서 계속해서 열심히 선을 행하라고 했습니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신 증거라는 것입니다. 숫자의 힘을 빌려 정치적 압력을 행하려 하거나, 자신들의 뜻에 어긋난다고 하여 정죄를 일삼으며 그 뜻을 관철시키려 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계절이 온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성경적인 판단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세상을 힘으로 압박하여 교회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으로 세상을 변화시킨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교회를 세상은 결국 외면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나아간다면 세상이 흔들리고 사람들이 흔들릴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이기적 욕망에만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 사람들은 도대체 뭔가?’ 싶은, 도무지 누를 수 없는 의문과 혼란을 낳을 것입니다. 진정한 선교란 성도의 삶을 통해 세상에 이런 의문을 일으켜 우리를 향해 질문해 오도록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이 질문에 ‘온유와 두려움’으로 대답하면 됩니다. 그런데 교회가 자신의 본질에서 벗어나 세상과 다를 바가 없으면 의문이 제기될 리 없고, 그러니 던질 질문도 없습니다. 세상은 묻지도 않는데 자꾸만 대답을 전하려고 하니 들을 리 없고, 볼륨만 높이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것이 복음이 아닌 소음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말은 쉽지만 소용돌이치는 시대의 격류를 거스르며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 지켜가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그러나 연약한 우리를 택하셔서 그 일 맡기신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니, 그분께 순종하고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친히 그것을 이루어 가시지 않겠습니까? 믿음이란 마땅히 그런 것이어야 할 터이고요. 지금은 당회와 구역회 등 한 해를 결산하는 무거운 업무가 앞에 놓여 있으시지요? 그런 기회를 연례적인 행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교회가 스스로를 돌아보며 자세를 가다듬어 새로운 출발을 다짐해 보는, 그야말로 진정한 ‘성회(聖會)’로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은퇴 후의 삶에 나태함 깃들지 않도록 복된 기회를 마련해주셔서 지난 1년을 긴장하며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임 목사님같이 진지한 자세로 교회를 섬기는 후배가 있다는 사실로 큰 위로를 삼을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의 사역을 큰 기대를 안고 지켜보며 이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혹시 부족하더라도 작은 힘 필요한 일 있을 때 언제든 제가 곁에 있음을 기억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남한강 우거에서
    구자경 목사 드림

    이 글은 <기독교세계> 12월호 "후배가 선배에게"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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